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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오후였다. 비가 한 바닥 쏟아진 뒤 물안개가 바닥에 짙게 깔려 물방울 알알이 발목에 걸렸다. 물방울은 포근한 가을 이불처럼 지면을 감싸는듯했다. 시린 오후의 해가 서쪽의 반을 지나고 있을 때, 부드러운 평화를 깨고 인공적인 높은음이 고막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주머니 속에서 울린 핸드폰이 소리를 냈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귀에 대고 발신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을 적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이 나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손은 덜덜 떨렸고,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떨어뜨린 뒤, 허공을 응시했다. 주변이 비현실적으로 흔들렸고, 발목을 부드럽게 감아 오르던 물안개가 나를 배신하여 머리가 괴로울 만큼 어지러웠다. 생경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전화기 너머의 낯선 목소리는 친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후 12시 3분, 이진경님과 최상필님께서 한암 병원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장례 절차에 관한 설명이 들려왔으나,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
세 명의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은 고등학생 한 명에게는 의미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 혼자 서재 방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앉은 채로 의자를 밀어 한 구석에 박아 두고, 책꽂이 하단의 책을 정리했다. 책들은 부모님이 남긴 유품이다. 책꽂이 깊숙이 놓인 가족사진은 보관함에 넣고, 책들 사이사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서류들은 따로 박스에 담았다. 남은 책들을 정리하던 도중, 책에 꽂힌 작은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혁신교회’. 들어본 적 없는 교회였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종교가 없었다. 아마 이 명함은 길거리에 전도하는 사람들에게서 받고 아무 데나 꽂아 놓은 것일 것이다.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책을 계속 정리했다. 책 절반을 정리했을 즈음, 또다시 혁신교회 물건을 발견했다. 책들 사이에 선교 전단지가 끼워져 있었다. 전단지를 읽어 내렸다. 일반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데자뷰, 사명, 각성’
교회 전단지에는 일반적으로 하느님, 사랑, 천국에 대해 쓰여있으나, 이 전단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또 일어났던 것 같지 않나요? 일상에서 데자뷰를 겪고 있다면, 당신은 세상을 구할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각성을 통해 힘을 개방하고 세계 멸망에 대비하세요.’
교회 전단지에 세계 멸망이라니. 데자뷰를 겪는다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혁신교회는 명백하게 교회 흉내를 내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이런 전단지가 왜 부모님 책장에 꽂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이런 종류의 사기에 당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버려졌어야 할 전단지가 왜 고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이 설마 이 종교를 믿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혁신교회 이름을 핸드폰으로 꺼내 검색해 보았다. 교회는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었다. 지나가면서 본 듯한 건물이다. 이 교회에 가면, 사람들에게 물어봐 부모님이 이 교회에 다녔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혁신교회 위치를 지도 앱에서 찾아 집 밖으로 나섰다. 시린 바람이 내 발목을 감아 올라왔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주홍빛으로 덮여 있었다. 화려한 색깔만큼 하늘은 내게 무심한 듯했다. 혁신교회는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화려했던 하늘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거무스레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둑해질 때, 나는 혁신교회 앞에 도착했다. 그 교회는 대한민국 도시의 여느 교회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빨간 십자가 스티커가 잿빛 건물의 창문에 눈에 띄게 붙어있었다. 창문에는 기본 글씨체로 ‘혁신교회’라고 적혀 있었다. 상가 건물 입구를 지나 혁신교회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불이 꺼져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 깊숙이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한줄기의 빛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직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운영이 끝난 것 같으니 다시 방문할까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 교회에 부모님이 다니셨는지만 여쭐 것이라, 실례를 무릅쓰기로 했다. 내 사정을 안 다면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방 문 앞에 도착했다. 긴장이 되었다. 문을 노크하기 앞서, 조심스러운 마음에 방 문 틈새로 방 안을 들여다봤다. 검은 옷의 중년 남성과 한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흰 수염이 얼굴 하부를 뒤덮고 있고 살집이 있어, 마치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 할아버지가 연상되었다. 그의 외양처럼 노인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방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내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노인이 뒤돌아서 가려하자 중년 남성은 옆의 의자를 집어 들어 노인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노인은 무너지듯 쓰러졌고 흰머리에 붉은 피가 흐르더니 이내 흰머리와 수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남성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고, 축 쳐진 노인을 발로 밀어냈다.
“내 일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눈앞의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놀란 감정이 내 몸을 얼어 붙였고,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정지된 상태로 방 문 앞에 서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내게 경고를 보냈다. 체감 상으로 일 겁의 시간 후에, 나는 가장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교회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교회 문 밖을 나간 뒤 한참을 달려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아직도 내 눈앞에 붉게 물든 노인의 흰 수염이 아른거렸다. 헐떡이는 숨이 잠잠해질 즈음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혁신교회가 부모님과 관련이 있을까 알아보려던 중에, 살인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 부모님의 사인은 둔기로 인한 피살이었다. 부모님은 등산가에 의해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살인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나 우리 부모님의 죽음이 저 교회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본 장면에서 중년 남성이 노인의 머리를 무심하게 내리쳤듯 내 엄마 아빠도 해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본 장면을 그대로 설명하고, 심하게 박동하는 몸을 애써 안으며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집은 여전히 내게 싸늘했고, 부모님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은 쉬지 않고 뛰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다음 날 아침, 반짝이는 소리로 참새가 지저귈 때 눈이 떠졌다. 하늘은 맑았지만, 나는 아직 어두운 하늘 아래 심장이 두근거리며 혁신교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일과 오늘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쏟아졌다. 그 교회는 사이비이고,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다. 부모님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사인도, 혁신교회의 정체도 덮어둘 수는 없다. 나는 그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서워도 딱 한 번만 더 교회에 가야겠다. 기억 속에 기독교를 믿는 친구가 아침 예배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아침의 햇살이 창문 안으로 쏟아질 때였다. 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집을 나서 혁신교회로 향했다.
혁신교회는 햇볕을 피해 그림자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밤과는 달리 사람이 북적이었고, 신자들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같았다. 신자들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신자들 속에 섞여 의자에 앉았다. 찬송가에 귀를 기울이니 그제야 곡의 가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신을 찬송해야 하는 가사 대신, 신을 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주인 없는 악보집을 발견했고, 서둘러 펼쳐 가사를 읽어 내렸다.
‘태초에 여러 신이 있으니~’
이 교회에서는 신이 여러 명이며, 선한 신과 악한 신으로 가르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한 신을 도와 악한 신을 물리쳐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웅이며, 모두 신을 죽일 의무가 있다고 했다. 전단지에서 본 데자뷰에 관한 가사도 있었다.
‘데자뷰을 느끼는 자가 능력을 깨우쳐 모두를 구할 것이니~’
이 교회는 데자뷰를 느끼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님도 데자뷰를 경험해서 이 전단지를 보고 혁신교회에 찾아왔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정말 이 교회를 믿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악보집의 노래를 계속 살펴보던 중, 모든 노래에 적힌 작곡가 이름이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작곡가는 종교에 심취되어 모든 찬송가를 작곡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 교회의 핵심 인물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종교에는 무지한 채 돈을 받고 작곡하는 프리랜서일 수 있다. 본인의 노래가 살인을 추앙하는 종교에 쓰일지 모르고, 기독교의 찬송가라고 생각하며 작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 관한 생각이 깊어지던 중, 주변 사람들이 함께 ‘아멘-‘이라고 말했다. 기도가 끝났나 보다. 조바심을 내며 나도 서둘러 ‘아멘’하고 외쳤다.
신자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밖으로 나갔다. 기도 시간이 끝나고 다들 귀가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내 시선은 부산스러운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다시 그 얼굴을 확인해